로마서 12:1
1.Therefore, brothers, by the mercies of God, I urge you to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pleasing to God; this is your spiritual worship.
2. Do not conform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Part 1
1절의 내용이 신기하다.
성서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이 듣기에는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들로 가득차 있다.
1절을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조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하고 하느님이 좋아할만한 상태로 유지한다면(1)
-몸에 우리의 뇌가 달려있으니, 몸이라고 한 것은 곧 사람 전체를 뜻할 것이다.
그것은 곧 살아있는 그 자체로 바치는 산 희생 제물이고(2)
이것이 곧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숭배라는 것이다.(3)
그럼 여기서 헷갈리는 부분은 그렇게 거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왜 제물이자 숭배가 되는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우선 숭배라는 것이 무엇일까? 정확한 의미는 사실 성서 내에서도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게다가 숭배나 worship도 번역한 단어이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사실 성서를 원어로 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나 신자든 아니든 간에 보통 숭배라고 하면 무언가 물질적이거나 아니면 구체적인 형태를 띈 행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돈이나 시간을 써서) 그런데 이 구절은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한다면 그 자체로서 하느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숭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느님에게,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기쁜(pleasing)것이다.
Part 2
왜 그것이 하느님에게 기쁜 일일까?
제자를 삼을 때의 기쁨과 같은 것일까?
보통 한 분야의 고수는 돈을 받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이는데, 아무 것도 모르던 백지 같던 제자가 그 분야에서 도가 트고 경지에 오르면서 자기가 느꼈던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일까?
그러면 하느님도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시지 않을까? 단순히 능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도덕적, 정신적, 학문적인 부분에서 자신을 닮아가고 최종적으로 거룩해질 때, 그로 인한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물론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진해서 노력하여 그런 경지에 오른다면, 이것은 그분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는데, 말하자면 사람을 만든 보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보람과 성취감을 조물주에게 안겨드릴 수 있는 것이다. (잠언 27:11)
과연 이런 종류의 느낌은 사람의 행복을 압도적으로 초월한, 오직 신들만 느낄 수 있는, 혹은 절대신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일 것이다. 정말 하느님이 느끼는 행복은 그 깊이와 강렬함이 어떨까?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디모데 전서 1:11)
어쨌든 그 단어가 ‘숭배’라서 종교적인 색채와 느낌을 띠고 있다 뿐이지 결국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애정표현’인 것 같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애정을 표현한다라고 하면 좀 거시기하기 때문에, ‘숭배’라는 단어로 바뀐 것 아닐까… 라고 가끔 생각해본다.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억지로 요구하지는 않듯이,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숭배를 강요하시지 않는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도 단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자녀가 자진해서 부모를 닮아가고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면 그게 곧 ‘효도’가 되고 자식 낳은 보람이 생기는 것처럼, 인간이 아무 대가없이 자진해서 하느님을 닮아가고(거룩해지고), 하느님에게 사랑을 표현하며 선한 행동을 하면, 그것은 곧 하느님이 기뻐하실 만한 ‘숭배’가 되는 것이다. (시편 97:10,11)
공식 : 거룩해지고 선해져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 =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 = 그분에 대한 숭배
즉, ‘숭배’라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동기는 하느님이 먼저 비이기적으로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에 대해 역시 비이기적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말이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숭배는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의무’이자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건없이 받은 사랑의 표현을 똑같이 조건없이 돌려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숭배를 얼마나, 어느 정도나 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든 크리스쳔이라면 숭배를 한다는 그 행위 자체에는 차이가 없다. (계시록 4:11)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었을 때, 혹은 누군가가 밥을 공짜로 사줬을 때, ‘잘 먹겠습니다.’, 혹은 ‘잘 먹었습니다.’ 라는 말은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그것은 밥을 사준 사람이 응당 들어야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역시 응당 숭배를 받아야만 한다. (숭배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보답’ 혹은 ‘애정표현’)
단지 차이점은 그 후에 설거지를 하든지, 혹은 밥을 사준 사람에게 다음 번에는 내가 산다든지…. 등등 사람에 따라 어떻게, 어느 정도로 보답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처럼 사람 역시 보답을 어떻게 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일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마음이 조금씩은 있다. 선한 행동을 하면서 마음 속 한 구석이 뿌듯해지고(그게 꼭 하느님 때문은 아니라고 느껴지더라도)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마음이 가득 찬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던 과거 조선시대의 전래동화에서도 ‘하늘’은 선한 행위에 기뻐하고 상을 내려주는 존재였다. 죄인이고 불완전했지만 사람에게는 늘 절대자의 눈에 옳은 일을 하고 절대자를 기쁘게 해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오직 절대자만 줄 수 있는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것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시편 119:1-3)
이렇게 이해한다면, ‘숭배’라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 아닐까?
모든 것을 창조한 하느님에게 있어서 우리가 가진 재산은 그 자체로는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즉, 우리의 시간, 노력, 재산, 재능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는 크게 의미가 없다.
왜냐 그 모든 것은 원래부터 이미 하느님의 소유였으니까.
단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 소유라고 착각할 뿐이다. 엄밀하게 까놓고 말하면, 진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하느님에게 ‘제물’ 혹은 ‘선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 노력, 재산, 재능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활용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66:1,2/ 시편 50:9-15, 51:16,17/ 호세아 6:6)
마치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서 그 돈으로 부모님에게 선물을 사줄 때, 의무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사랑으로 우러나와서 했을 때만 부모님이 그 아이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사실 아이가 부모를 위해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무언가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선한 마음과 행실로 하느님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곧 하느님이 사람을 매우 사랑하시고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해지고, 자신과 같은 행복과 희열을 누리길 바라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반대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을 것이고 또 하느님이 특정한 감정을 갖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창세기 6:5,6)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하는 행동에 우리가 크게 영향을 받듯이,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하느님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1절 첫 부분을 다시 보면 그 말씀이 이해가 된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독자들에게 간구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동정심/자비로 인한 것이라는 점. 즉, 이렇게 바울이 호소하는 행위는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서라는 점이다. 아마 우리가 1절에서 묘사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최종 결과가, 혹은 그 자체로서 이미 슬픈 것이기 때문일까?
거룩해지지 않고 하느님을 닮지 못한다면, 스승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결국 손해를 입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 9:10-12)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로마 12:2이 소개되고 있다. 이 부분은 그냥 읽으면 이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하지 않았다. (걍 귀찮아서) (미가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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