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하느님은 이미 자신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세상에 공개해놓았는데(잠언 1:20-22) 세상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지혜를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은 차라리 전파되는 것(내용)의 어리석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내용이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성서의 내용이 좀 배웠다는 사람들(20절에서 말하듯)이 보기에는 아둔하고 지적으로 떨어져 보일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성서 내용을 보면, 과연 조물주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방식으로, 굉장히 교묘(?)하다.
굉장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한데, 모순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내용들과 오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많으며 비평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리고 두께도 상당하다. 잘 만든 하드커버 성서라면 무기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 하느님이 존재한다
(2) 하느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성서라는 도구를 통해 지혜를 전달하고자 목적하셨다
고 가정한다면 성서는 말 그대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도제 제도(Apprenticeship)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장인이 가진 특수한 지식이나 기술은 사실 과외식으로 붙어서 밀착 교육(?)을 베풀지 않으면 전수받기 힘들다. 이때 장인이 집필한 교본이 있다고 한들, 그건 보조적인 교육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장인이 자신이 집필한 책만 보고도 자신의 모든 지식과 기술을 흡수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친절하게(?)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건 장인의 마음이다. 위의 구절은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도록 결정했다는 뜻이다.
근데 이건 인간계를 초월한 영적인 존재가 자신의 세계에 속한 지혜나 지식을 그대로 ‘전수’하고자 하면서 생기는 불가피한 문제이다.
영적 세계라는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인간과 그 세계 사이에는 ‘접점’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능력만 의존해서 영적 존재들의 지혜를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이다. 물론 단순히 지식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지식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 이해라는 것은 사실 사람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어가는 일종의 ‘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 3:5-7)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 그리고 영성, 인격 등등 그 사람의 영혼 전체를 끌어올려(?)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아니, 교정이라고 표현하면 뭔가 강제성이 부여되는 것 같아서 다른 말로 하자면(크리스쳔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신적/영적 ‘회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가 잃었었던 ‘인간 완전성’을 서서히 되찾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좀 더 하느님처럼 되는, 하느님적인(God-like)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는 회복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 그 자체가 아닌 실체를 단순화시킨 것을 묘사한 ‘진리의 모음’들을 믿음없이 받아들이면 일면 굉장히 단순하게 들리고 허무맹랑하며 근거 없이 들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이 절대사랑/절대도덕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했을 때에나 맞는 말이지, 마음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다면, 이것은 회복이 아니라 강제적 교정이 될 것인데, 물론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존중하심으로 그런 일은 대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대부분,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한 채 성령을 받아들이다가 뒤늦게 자신의 본 정체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위의 글은 특정한 일련의 사실들을, 위에 있는 (1),(2)가 ‘진리’라고 가정하고 나열한 생각의 흐름이다.
참조 성구 : 고전 2:9,10 / 요한 10:27 / 이사야 55:8,9 / 데살 후서 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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