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무려 피땀을 흘리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ㅎㄷㄷ…)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기록을 보면서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피땀 같은 것을 흘릴 수 있어?” 를 외치며 성서의 신빙성에 재차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22:44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땀이 피처럼 흘러내렸다는 뜻이지 직접적으로 피를 흘렸다는 기록은 아니다. 즉, 문자 그대로 진짜 피땀일수도 있고 핏방울같은 땀일수도 있고 둘 중 하나라는 뜻.
문제는 누가의 직업은 당시 의사였다는 것이고 또한 피땀이 아니라면 굳이 핏방울처럼 흘렀다는 표현을 써가며 헷갈리게 만들 이유가 없기에 많은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이 핏방울을 흘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이것이 단순히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수님이 정말 피를 흘리고 계셨다면 의사였던 누가가 그렇게 모호하게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 있던 다른 제자들이 피에 얼룩진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나 피땀이 아니고 그냥 땀이었다고 헤도, 땀이 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경우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발생함으로 그분이 느꼈던 정신적 고통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정말 피를 땀처럼 흘리는 경우에 관해 살짝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혈한증’, 영어로는 Hematidrosis 라고 불리우는 증상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극도의 신체적
혹은 감정적 스트레스….
그러면 예수님이 그토록 정신적 스트레스에 처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고나면 피땀을 흘렸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신체적 고통.
우선 한 가지 이유는 이 때는 예수님이 처형되기 바로 전이었고 또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누가 9:22) 그 뿐 아니다. 하느님과 함께 인체를 만든 분이셨기에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 얼마나 아플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의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채찍질 + 기둥에 못 박힘)
사실 이것만 생각해봐도 그냥 땀 수준에 그쳤다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것이다. 로마 시대의 채찍질과 못 박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다른 곳에서 잘 설명하고 있기에 여기선 굳이 적지 않겠다.
둘째, 대속
이전 글에서 길게 설명하였기에 다시 다루지 않겠지만, 간단히 말해 예수님이 충절을 유지하지 못하면 대속의 값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는 충격과 공포의 상황이 연출된다. 이건 이것대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다른 완전한 천사가 다시 땅에 내려오면 되긴 하지만 그 전에 더 큰 문제가 있으니 바로…
셋째, 인류의 충절 쟁점
이전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원래 이 세상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세상이었는데 사탄이 하느님의 통치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때 하느님의 통치를 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고 일단 사탄의 말 대로라면 하느님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형편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통치를 원하고 자진해서 찾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욥기 1,2장)
즉,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임으로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재산을 뺏거나 죽음이라는 시험 (즉,일반적으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의 생명을 내놓는 것)으로 유혹하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통치를 저버릴 것이다’.
라고 주장한 것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여호와 곁에서 엄청난 세월을 같이 살았고 하늘에서도 이미 최고의 모범생, 가장 사랑받는 피조물의 역할을 맡은 완벽하기 이를데없는 완전함 그 자체인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죽음 앞에서 하느님을 버린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완전한 사람이 하느님께 충실하는 것 (하느님의 통치권을 지지하는 것) 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보다 더 모범적인 천사가 없었기에 이 경우는 진짜 단순히 대속에 실패한 것보다도 더한 충격과 공포, 혼돈의 카오스를 불러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한 마디로 사탄에게 ‘니가 사람은 시험 아래서는 하느님에 대한 충절을 지키지 못 한다고 했으니 한 번 할 수 있나 없나 해보자.’ 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4:1-13)
그리고 그 목적은 완전히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으므로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고통스러워야 했을 것이다.
하느님이 ‘이 정도면 충절과 관련해 완벽히 증명할 수 있겠다, 앞으로 영원히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라고 결정하셨다면 그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넷째, 그냥 공포 그 자체
위에 상기한 이유들로 인해서 예수님은 당시 굉장한 두려움과 염려를 느끼셨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히브리서 5:7,8 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성구를 소개한다.
5:7 예수께서 육체 가운데 계실 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해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5:8 그분은 아들이신데도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죽음에서 구원’이라는 부분이다. 이상하기도 한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출하시기 위해서는 실제로 죽으셔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실을 유지하고 죽으셨다면 부활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 즉, 예수님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반드시 죽어야만 하셨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충실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활의 희망없이 진짜 문자 그대로 죽는 것을 뜻한다. ‘무(Nothingness)’ 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충절을 지키지 못하고 완전한 인간인 상태에서 죄를 짓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한 범죄임으로 그 순간 하느님과 단절되고 아담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70,80년 밖에 못 살아도 죽음의 그 순간에는 삶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리기 힘들지언데, 그 영겁의 세월을 죽음의 공포없이 행복 무탈하게 살다가 죽음이 실제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아무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이 바로 눈 앞에 닥쳤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느님과 천사들과 악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약간의 사소한 죄도 짓지 않고 기둥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완벽한’ 충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 무게가 어땠을까. (히브리 4:15)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도입부에서는 사탄이 예수에게 계속 중얼거린다.
“정말 한 사람이 모든 죄를 짊어질 수 있을거라 생각하느뇨?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랑께… 포기하면 편해.”
게다가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의 상태로 기둥에 매달렸다. 즉, 죽음을 앞둔 그 순간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완벽히 단절되고 끊긴 그 처절한 영적 어둠을 뼈저리게 느끼셨다는 것. (고린도 후서 5:21/베드로 전서 2:24/ 갈라디아 3:13/ 이사야 53:4/
신명기 21:22,23)
만약 그렇지 않았고 시시각각 아버지인 여호와와 밀접히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면 천사가 내려와 힘을 줄 필요도 그리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누가 22:43)
율법 시대 때 염소 한 마리에게 백성 모두의 죄를 얹진 뒤에 광야로 보냄으로써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용서한 것과 마찬가지.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였다면 예수의 경우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죄를 영원히 없애셨다. (레위기 16:20-22 / 히브리 9:12)
이제 예수님이 피땀을 흘렸는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점은 무엇일까?
바울은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고 말한다. (갈라디아 2:20)
예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나’에게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이시다. 즉, 하느님과 ‘나’를 화해시키는 분이라는 것. (고린도 후서 5:19/디모데 후서 4:8)
‘중재’와 ‘화해’라는 과정 자체가 개인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집단이나 단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그냥 의결이라고 하지 화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화해에는 개인이 정신 깊은 곳에서부터 마음을 바로잡고 다른 일방과 맺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그토록 고생하고 죽으신 것은 바로 ‘나’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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