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뜻한다.
그러면 대속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예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예수가 만인을 위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1) 대속의 정의
(2) 대속의 법칙
(3) 죄의 출현
(4) 누군가를 대신하여 속죄함
(5) 예수의 죄 없는 신분
(6) 예수의 희생으로 인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7) 대속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1) 대속의 정의
대속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명사 중 하나인 “코페르”는 덮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에서 나왔다. 카파르의 의미는 to cover, 즉 ‘덮다’의 의미이지만 거의 언제나 죄를 속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카파르의 변화형인 명사 코페르는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주어진 대속의 값을 가리킨다.
덮다라는 뜻을 가진 카파르가 죄를 용서하는, 즉 속죄의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서에서 말하는 대속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2) 대속의 법칙
성서를 공부하면 다음과 같은 대속에 관련된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 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치루어져야 용서가 된다, 혹은 처리 완료된다.
탈출기 21:23-25
“23 그러나 누군가 죽었다면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며,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즉, 죄가 발생하면 그 죄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희생을 치루거나 혹은 처벌을 가함으로 죄가 사라지게 만들거나 용서되어야 한다. 죄는 하느님 보시기에 굉장히 거슬리는 일종의 우주적인 부조화(Cosmic disharmony?)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인자한 아버지임과 동시에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셔야 하기 때문인데, 죄가 발생하면 그 죄에 대한 조처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만물을 주관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 12:13,14)
아까 ‘덮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 가 주로 ‘대속하다’를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뚜껑과 통의 크기가 다를 경우 덮을 수 없는 것처럼, 죄의 크기와 죄를 사하는 대속물의 크기가 다를 경우 닫히지 않는 통처럼 되어서 속죄할 수가 없다.
위의 성구에서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똑같은 가치의 것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뚜껑의 크기와 모양이 통과 같아야 덮어지는 것처럼, 희생(혹은 처벌)은 지은 죄와 가치상 같아야 덮어진다. 즉, 대속이 된다.
- 대가를 치루기 위해서는 죄에 알맞은 대가가 피로 치루어져야 한다.
1번에서 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치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율법 시대 때 유대인들은 보통 동물의 피를 통해 속죄 의식을 치루었다. 죄가 발생했을 경우 동물을 희생에 바침으로 속죄를 한 것이다.
레위 17:11
“11 육체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해 속죄를 하도록 제단에서 쓰라고 그것을 주었다. 피가 그 안에 있는 생명으로 속죄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께선 몸 안에 있는 피가 속죄를 한다고 여기신다. 피가 없으면 어떤 생물이든 살아갈 수가 없으므로, 피는 생명력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피는 생명력을 대표하거나 상징한다.
히브리 9:22
“22 그렇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며, 피가 쏟아지지 않고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보면 대략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야 했는지 어느 정도는 감이 잡힐 것이다.
(3) 죄의 출현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고의적으로 먹으므로 죄를 지었다. 이 것이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원죄’이다. 타락하게 된 그 두 부부에게서 나온 모든 자녀들 역시죄인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죄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도둑질같은 형사상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유전죄로 인하여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마음이 그릇되어 있다는 것이 성서의 사상이다. (창 6:5,6)
하느님은 선한 분인데 하느님이 만든 것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하느님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었다. 즉, 원래는 성선설이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성악설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의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느님만 알 수 있는 어떤 모종의 방법으로 인해 그들은 죄를 지은 후 타락하게 되어 타락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죄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지위를 박탈당하고 (로마 8:18-22) 하느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죄라는 유전적 불순물로 인해, 유전적으로 돌연변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죄인의 몸에서는 죄인밖에 태어날 수 없음으로, 아담과 하와가 낳은 모든 후손은 모조리 죄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더 자세한 점은 로마 5장 12-21절을 직접 살펴보자.)
부모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인 우리도100퍼센트 죄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죄는 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너스로 죽음까지 가져다준다.
그것은 바로 또 다른 우주의 법칙, 죄는 죽음을 가져다준다는 법칙 때문이다.
로마 6장 23절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위에서 보면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적혀 있다. 달리 말하면,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사람들끼리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범죄 (이를테면 살인, 강간 등)를 지을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하느님이 보기에는 이 성서에서 말하는 죄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 형벌은 사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 유전법칙에 의하여 우리는 죄를 물려받았고,
- 죄의 법칙에 의하여 대속물이 주어지지 않는 한 죄가 용서받지 못하며,
-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규칙에 의거해 죄인인 우리들은 모두 죽는 것이다.
상당히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다.
-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를 사함.
- 예수의 죄 없는 신분
- 예수의 희생으로 인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이 점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자.
(4)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죄를 사한다?
대속이라는 개념을 모든 사람이 쉽게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할 수가 없는 이유가, 보통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죄를 다른 누군가가 짊어지고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죄를 없앤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오늘날 사형수가 지은 죄에 대해서 다른 누가 나타나서 대신 죽겠다고 해서 그 사형수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된 것 역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면, 납득은 가겠지만 억울하게 생각될 것이다. 비슷한 이치이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대속 마련을 만드신 것이다. 이건 마치,억울하게 남의 빚을 지게 된 사람을 위해 국가에서 무료로 빚을 탐강해주는 것과 같다. (마태 20 : 28 )
(5) 예수의 죄 없는 신분
대속의 법칙에 의하면 죄에 상응하는 대가가 피를 통해 치루어 져야 완전히 죄가 사해진다. 즉, 속죄가 된다. 달리 말해, 얼마나 억울하든 간에 우리는 일단 아담의 자손임으로 죄인이 되어버렸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가 부각된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가상 문답을 보자..
Q : 율법에서는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함으로 죄를 사했다. 즉, 생명은 생명으로 갚음으로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 역시 죄를 지은 후 사망하여 죄값을 치루게 된 것이 아닌가? 이미 처벌이 끝난 죄를 우리가 이어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로마 6:7 참조)
A : 그게 그렇지가 않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인간인 상태에서 완전한 죄를 짓고, 완전한 생명을 잃었다. 그 후에 죄인으로서 죽을 때는 죄인으로서 죽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잃은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생명이지만 죽을 때는 죄인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덮는 것, 즉,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대속물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
아담과 하와의 자손은 모두 불완전한 죄인임으로 완전한 생명에 부합되는 가치를 제공할 수 없다. (시49:7-9) 죄가 없는 완전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죽어서 그 피로 대속물을 바쳐야 하는데,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러면 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편법 아닌 편법을 써야 한다. 이 땅의 인간 중에는 죄인이 아닌 인간이 없음으로 죄인이 없는 하늘 왕국의 천사들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변화하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즉, 영적 존재가 육적인 존재가 되기 위하여 물질화(materialization)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70억이 되든, 1000억이 되든 영원히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호세아 13:14)
그러면 과연 그 수많은 천사들 중 누가 내려와서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했을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분명히 많은 천사들이 기꺼이 가서 희생을 바치고자 자처했을 것이다. 허나 하느님은 여러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이 천사가 가서 확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사탄의 유혹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죄 없는 신분으로 자신을 대속물로 바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물질화한 하느님의 천사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 죄인이 될 경우 그런 천사가 자신을 희생으로 바쳐 보았자 아담이 잃어버린 완전한 생명에 부합하는 대속물을 제공하지는 못할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제일 처음 창조한 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게 될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그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주제가 예수의 대속인 이 글을 넘어가 하느님의 계획 아래 예수의 왕으로서의 역할까지 논하게 되는 것임으로 여기서는 깊게 다루지 않겠지만, 하느님이 예수를 보냄으로 인해 어떤 장점이 생기는지는 성서 자체에서 다루고 있다.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천사 예수를 물질화하기로 결정하셨고, 예수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공적으로 죄 없이 자신을 바쳤다.
(참조 성구 베드로 전서 2:22/ 히브리서 7:26 )
이런 점을 이해하고 나면 왜 사탄 마귀가 누가 4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려고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6) 예수의 희생으로 인해 드러난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요한 첫째 4:9, 10: “이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 희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로마 5:7, 8: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히 죽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추천하십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처음 난 영적 생명체, 다른 말로 하면 천사였다. 성경에 의하면,하느님은 창조 사업을 독생자인 예수와 함께 하였으며,(참조 골로새 1:13-20), 예수는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의 대변자로 (요한 1:1-3) 묘사되고있다.
즉, 예수는 여호와 하느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천사였던 것이다. 또한,하느님과 홀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만큼 관계는 끈끈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인간 부모가 자신의 정자와 난자로 단지 태어나게 만들었을 뿐인 자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직접 만든 아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생성된 사랑의 크기는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예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천사는 하느님과 예수 두 분의 합작품이지만, 예수 만큼은 하느님께서 홀로 창조하신 첫 번째 천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성서에서 독생자라고 묘사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이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신 것은, 그분이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는 사랑을 최대한의 정도로 표현한 것이다.
(7) 대속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대속은 돈이 많은 사람이 관대하게 자신의 재산을 바쳐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준 것과 같은 이치임으로, 사실 대속의 유익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오직 한 가지 조건은 대속의 유익을 받기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빚을 탕감해준다는데 마다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생각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빚이 있어 파산을 하였기에, 기타 시민의 의무(세금 납부나 법 준수 등 다양하고 자질구레한 법률)를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현재 생활을 즐긴다면, 그런 제도를 마다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시민이 아니라 죄와 죽음으로 인해 속세의 시민인 상태에서 굳이 번거로운 하느님의 시민이 되고자 원치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요한 17:15,16 및 요한 3 : 17 -21 참조)
히브리 11:24,25 에서도 죄에는 즐거움이 따른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의 시민이 아니기에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쾌락이나 나름대로의 특권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면 대속을 마다할 가능성이 있다.
대속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요한 3:16-19/요한 첫째 2:2)
그러나 유익을 얻으려면 언급한 것처럼 최소한 대속을 원하고 또 대속에 대해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마치 빚을 탕감해주는 국가의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거나 부인하면,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지 않을 것임으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함과 비슷하다.
그러나 믿음 뿐 아니라 행동으로 그러한 마련에 보답해야 한다. (고둘 5:14,15)
죄를 얻기 전의 사람의 상태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자녀였으므로,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자 싶어한다는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야하는 것이다.
반대로 계속 죄인인 상태로 남고 싶어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대속의 유익을 얻을 수 없다. 고의적으로 반복하여 죄를 지을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는 빚을 탕감할 마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적절하게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누가 3:8)
구원을 계속 이루어 나가라고 조언한다. (빌립보 2:12)
요약하자면 대속을 원하고 믿고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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