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성서를 믿기 힘든 이유 (1)부

(0) 서론

(1) 믿음이란

(2) 성서를 믿기 힘든 이유

(3) 현실에 대한 인식

(4) 왜???

(5)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법

(6) 믿음이 중요한 이유

(7) 방해물?

(0) 서론

오늘은 믿음이란 것에 대해서 한 번 다루어보고 싶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종교적 믿음 혹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왜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없는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이며 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믿음이란

크리스천의 믿음은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1.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믿음.

2. 성서에 대한 믿음.

그런데 여기서 굳이 더 중요한 것을 꼽자면 성서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면 성서가 오늘날 크리스찬들을 위한 믿음의 뿌리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서에서는 우리를 만든 유일신인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디모데전서 1:17) 또한 성서는 그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디모데 후서 3:16) 현재까지도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논란의 원인 자체가 바로 성서라는 것이다.

만약 성경에서 하느님이 아닌 외계인 무리들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면, 현재 크리스쳔들은 유일신인 여호와가 아니라 외계인들을 믿고 있을 것이다. 현재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전체 체계는 성서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 자체가 믿음의 근간이 된다. 만약 성서가 없다면 창조주가 하느님인지, 외계인인지, 천사인지 아니면 그냥 진화인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성서에 대한 믿음이 왜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 더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성서를 믿는다면 곧 성서 안의 내용도 다 맞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성서에서 다루는 하느님, 사탄 등의 존재도 믿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핵심은 성서를 믿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전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서에서 소개하는 것인데 그 성서를 읽어본 적이 없다면 당연히 하느님에 대한 뚜렷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 일차적으로 믿음이란 성서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성서를 하느님이 썼다는 생각을 점점 튼튼하게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즉, 성서 자체의 무오성, 완전성, 신성성(?)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점차 커져가는 과정이다. 그런 믿음이 점점 강해지면, 당연히 성서에서 말하는 내용에 대한 믿음도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2) 성서를 믿기 힘든 이유

그런데 성서가 단순히 역사책이었다면 지금처럼 공격을 많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사람에 따라서 전래동화 내지는 판타지 소설로 간주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있고 후대의 사람이 과거의 사람인 척 쓰지 않는 이상 말이 안 될 정도로 정확한 예언 혹은 역사적 디테일도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니면 무협지? – 사사기 15:15-17)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나 주장들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존재해야한다. 바꿔말해, 성서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기록을 믿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며 반대로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성서의 말씀이 말도 안 되는 신화 모음집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성서는 성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라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딘가에 하느님이 존재한다.’ 라는 조건부터가 성립이 되어야하는데, 이 조건은 과학적으로 혹은 수학적으로 증명이 안 된다.  증명이 안 되기 때문에 ‘믿음’의 개입이 요구되는 것이며, 믿는 사람에게는 성서가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안 믿는 사람에게는 성서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한 권의 책이 이렇게 달라진다.

어쨌든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현재(2017년)의 일반 상식으로 봤을 때는, 하느님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성서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서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게 쉬운 게 아니다. 성서를 믿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되고, 하느님을 믿으려면 성서를 믿어야한다. 아무리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가 많아도 하느님을 안 믿으면 성서는 끝까지 믿을 수 없다. (흔히 말하는 순환 논리가 여기서 탄생하는 것일까?)

그러면 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을까??

  5분 동안 생각해보자..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과학적/수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간접적인 증거들은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증거면 증거지 간접적인 증거라니? 예를 들어 우리가 타임머신을 만들다가 실수로 수 백년 전의 과거로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말투나 행동이 이상해서 첩자로 오인받아 사형될 처지에 이르렀다. 우리의 결백을 밝히려면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어떻게 밝히겠는가? 우선적으로 밟을 수 있는 첫 단계는 바로 우리가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3:16)

물론 그렇게 말하면 미친 사람으로 오인받아 사형 날짜가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운이 좋아 권력있는 사람이 한 번 우리에게 증명할 기회를 준다면,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경험과 역사 지식을 최대한 살려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정보/지식/기술을 선 보임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다. 몇 년 뒤에 기근이 난다거나 어떤 학문적인 성과를 발휘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마태 24:3-14 / 욥기 26:7)

문제는 이 사람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지식을 선보였기 때문에 분명 그 사람의 말을 믿는 사람도 많겠지만, 안 믿는 사람이 아마 더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나면 증거가 있든 없든 그들의 상식으로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조선시대 사람은 중국이랑 일본 너머에 다른 나라가 뭐가 있는지도 몰랐을 정돈데 미래에서 왔다는 발언은 거의 미친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전히 소수의 사람은 그 사람의 말을 믿을 것이다.

 위에서 어떤 단어를 썼는지 보이는가? 그렇다. 바로 ‘믿음’이다. 왜냐면 미래에서 온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증거는 전부 간접적인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타임머신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미래로 가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증거가 많아도, 결국엔 그 사람의 말은 믿음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직접 볼 수도 없고 실제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타임머신은 영원히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타임머신은 영원히 불가능하지만, 예를 위해서 사용하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간접적 증거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요한 3:12,13 참조) 여기서 ‘과거’는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이고, ‘미래’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의 세계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영의 세계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어로는 Spiritual realm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천사들이 살고있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뜻한다. (고린도 전서 15:38-40/ 요한 4:24) (비슷한 느낌의 영상)

이런 영의 존재나 세계는 결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측정 가능한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데, 영의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서 측정할 수 없고 따라서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증명을 못 할 것이다. 혹 과학적 증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예로 든 간접적 증거 정도 수준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암흑물질’같은 거. 항목을 읽다보면 ‘믿고 있다’ 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러한 영의 세계가 물질 세계를 초월했다는 점은 성서에서도 언급이 되곤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 9:20-23에서는 다니엘이 기도를 마저 끝내기도 전에 천상계에서 보냄을 받은 천사가 다니엘 곁에 도착한 장면이 묘사되어있다. 만약 정말 차원이 다른 영의 세계가 있다면 이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니다. 어딘가에 있는 우주 저 편에서 이 쪽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차원이동을 한 것이기에 시간이 걸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설사 우주를 여행한다고 하더라도 물질이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빛이나 중력파보다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천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는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과학적, 즉 과학을 초월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창조 과학’같은 학문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헛되다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의 과학적 설계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설계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존재로 이어지는 공식, 즉, ‘피조물의 과학적 설계 = 하느님이 존재함’ 과 같은 수학적 공식으로 직접적인 연결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학식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거나 대단한 인재일수록 하느님을 믿기가 힘들어지는데, 그런 사람들일수록 지적으로 까다로워서 매우 정확한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1:26,27) 이런 것을 보고 바로 ‘과학적인 사고’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하느님의 존재는 과학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비과학적이다.’라고 누가 주장해도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하느님은 초과학적이다.’ 라는 표현이 크리스천의 입장에서는 맞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은 듣기 거북할 테니 배려 차원에서 굳이 말하자면 ‘하느님의 존재는 비과학적이다.’라고 표현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 11:6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 보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라 혹은 이해해라가 아니라 믿어야 한다고 나온다. 어떻게 보면 재밌는 성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특성뿐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가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성서 자체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동식물이나 지구 등의 설계, 질서, 다양성 등을 보고 하느님의 지성을 발견하고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 없다.(에스겔 14:14 참조) 그런 증거는 간접적인 증거이고 아무도 하느님이 그것들을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성경을 열심히 읽다가 이건 도저히 사람이 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믿음이지 아무도 그 어떤 논문으로도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성경을 쓰도록 했다는 객관적, 과학적 증거는 제출할 수 없다.

그런데 물론 믿음을 가지기 힘든 이유가 이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종교의 행위에 있을수도 있다. 종교에 실망하면 그 종교에서 믿는 성서에 대해서도 믿음을 잃게 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 종교들이 반드시 하느님의 대변자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마태 7:21-23/로마 10:1-3/사도행전 20:29,30) 사실 돈이나 권력 등에 탐욕을 가진 사람이 가장 혹세무민하기 좋은 분야도 종교다. 사실 성경은 코에 붙이면 코걸이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가 되는 특성이 약간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성경을 통해 자신만의 교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도 할 수 있다!!(물론 말빨은 좀 필요할 것이다) 말이 안 되도 그냥 우기면 된다. 우기면 어쨌든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다. 그러면 그냥 종교 하나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후에 어떤 종류의 심판을 받을지는 오직 상상에 맡겨야겠지만… (고린도 후서 11:14,15/ 갈라디아서 6:7)

믿음을 가지기 어렵다면 혹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종교 전체에 대한 혹은 성서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성서에서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파괴하는 사람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해 놓았다. (마태복음 18:4-7)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더더욱 종교가 아닌 성서 그 자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세줄 요약

  1. 성서가 환타지 소설이 아니기 위한 전제조건은 ‘하느님이 존재한다.’이다.

  2. 그런데 하느님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고로 성서도 믿기 힘들다.

  3. 성서를 믿는다는 사람들 하는 짓이 영~ 양아치다.

그러면 대체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떻게 가지는 것일까? 나 역시 완벽한 해답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3) 현실에 대한 인식

우선 첫째로 일반적인 크리스찬의 생각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을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다.

첫째는 현실에 대한 개념을 재조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의 세상은 성서에서 말하는 영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요한 8:21 참조)

우선 편견, 고정관념, 패러다임, 아비투스 혹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우리가 스스로와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신념 체계, 그 자체가 사실 우리를 옭아맨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결국 특정 시대에 사람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도달한 공통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분명 나름의 합당한 이성, 믿음, 이유가 존재한다. 즉, 어느 정도는 안전함을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이 강할수록 자신의 주장, 자신감이 강해지고 너무 없으면 팔랑귀가 되면서 사기를 잘 당하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이러한 신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너무 상식 혹은 자기만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적당한 논리성을 갖춘 사이비에 휘둘리게 될 수도 있다. (디모데 전서 4:1-3/ 디모데 후서 3:5-7/ 사도행전 20:29,30 참조) 반면 자신의 세계관이 뚜렷한 사람은 쉽게 남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특정 종교에 귀의하는 일이 드물다. 여자에 비해 남자가 종교를 쉽게 믿지 않는 것도, 그러나 한 번 믿으면 그만큼 열정적이 되거나 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도 남자 고유의 신념, 자신감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체계가 내가 살고있는 시대, 나라, 주위 사람에 의해 틀잡힌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온전히 확신해서 직접 쌓아올린 것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신념은 나의 환경이 만들어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확인하고 확신해서 만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끔씩은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나를 둘러싼 환경, 세상,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우리 앞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매우 강력하고 굳건해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매우 임의적인 것이다. (고린도 후서 4:18 참조) 예를 들어 한국에 살고 있으면 한국의 모든 것 (정치, 치안, 문화, 사람, 정서.. 심지어 사람들의 표정, 말투 그리고 성격까지)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고 따라서 굳건한 현실, 심지어는 우주의 유일한 현실처럼 느껴지겠지만 외국에 나가서 오랫동안 살다보면 한국의 그 어떤 것도 거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은 한국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속성이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시대, 공간, 문화 등 여러가지의 요소로 인해 나를 둘러싼 환경, 즉 현실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은 매우 임의적인 것이고 게다가 그 수명조차 짧다. 당장 지금 대한민국의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간의 세대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그것만 생각해봐도(세대 차이는 각 세대가 자라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알려준다. 따라서 두 가지 현실 사이의 갭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증거다)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빨리 바뀌고 얼마나 유리처럼 연약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고해서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을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첫 단계는 분명히 될 수 있다. 왜냐면 성서에서는 지금 이 세상이 진짜 현실이 아니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요한 1서 5:19/ 요한 1서 2:17/ 디모데 전서 6:17-19) 이런 외부적 현실뿐 아니라 내부적 현실과도 마주해보자. 내부적이라는 것은 나의 육체가 가진 환경을 뜻한다. 우리 중 누구도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 성격, 특징, 건강 등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신의 재능조차 결정할 수 없다. 물론 노력이 상당 부분 바꿀 수 있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가진 모든 내면적 특징은 두뇌라는 고기 덩어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이 내부적 현실도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게된다. (고린도 전서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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