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서론
(1) 믿음이란
(2) 성서를 믿기 힘든 이유
(3) 현실에 대한 인식
(4) 왜???
(5) 진정한 믿음을 가지는 법
(6) 믿음이 중요한 이유
(7) 방해물
(4) 왜???
믿음과 관련해서 (1)부의 글을 쓰고 나니 궁금점이 생겼다. 왜 하느님은 굳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나누어서 우리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게끔, 하느님의 존재를 볼 수 없게끔 만드셨을까? 굳이 왜 ‘믿음’을 가져야만 하도록 하셨을까?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면 믿음 또한 가지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 점이 궁금해서 생각해본 결과, 도출되는 결론은 바로 ‘피조물의 다양성’이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생각을 할 줄 안다고 가정해보자. 미생물이 과학 공부를 하다가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사람 몸 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공부를 하다 보니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라는 것이 있고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있고 태양계는 더 큰 우리 은하에 속해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때 이 미생물이 우주의 존재와 크기에 대해서 과연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미생물의 한계를 생각해봤을 때 그저 믿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 자신의 몸으로 인지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이다. 근데 미생물이 하느님에게 왜 날 이 따위로 멍청하고 모자라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 있을까? (이사야 45:9,10 참조) 미생물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의지에 위한 것이고 나름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미생물은 다양한 피조물 중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창조주인 여호와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사람도 사실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람의 역할이 있고 사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하느님에게 기쁨을 주고 그분에게 영광을 더한다. (고린도 전서 10:31)
그런데 우리가 이렇듯 자신이 어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날지 정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로 있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38-40) 바꿔말해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히브리 2:10)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는 의미는 능력이 무한하다는 의미이고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은 창조력도 무한하다는 뜻이다. 이 무한한 창조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그래서 이 창조성은 하느님이 우주를 만드실 때 무한히 발휘되었다. 문제는 하느님이 너무 창조력을 발휘하신 나머지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가 생겨나버리게 된 것인데, 하느님과 천사가 있는 영적인 세계와는 조금의 공통점이나 겹치는 부분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 즉, 물질세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아예 차원이 다른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 다시 그 차원의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는 피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피조물은 피와 살로 구성되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주어진다…(고린도후서 3:18/에베소 5:1) 생각해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창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창세기 1:26,27)

물론 첫 인간 창조 당시에는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느님이 ‘아, 너희 인간들은 날 볼수도 없으니 날 믿기가 힘들겠군. 허허, 거 참 안타깝네.’ 라고 끝내셨을까? 아니면, 흙에 불과한 사람이라도 자신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끔 뇌속에 충분한 역량을 주셨을까? (시편 103:13,14 ) 비천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이 그에게 자신을 알아보고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는다면 그건 하느님의 손해일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고 숭배할 수 있는 길을 빼앗는 것이니까 말이다. (계시록 4:11/ 이사야 42:8) 화가가 완성된 작품에 자신의 사인을 남기듯이, 하느님 역시 완성된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또 그 작품이 자신을 인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심지어 사람도 자신을 알아보는 개처럼 똑똑한 동물을 선호한다.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않는 천사나 악마는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왜냐면 그들은 같은 차원, 적어도 비슷한 차원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 야고보 2:19 참조)
그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손해다. 사람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고 결국에는 하느님처럼 되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는데 (창세기 1:27/ 로마 8:20,21 참조),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조차 실패한다면 그 이후 진도는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역량을 주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는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고 사람의 존재 의의도 방향을 잃게된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모든 면에서 굉장히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무신론자들이 더 많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많다는 점은 사람의 이러한 영적인 역량을 증명해준다. (창세기 1:26/ 사도행전 17:27)
그에 더해 하느님은 사람이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추가적인 마련을 하셨다. 이에 대해서도 성경에서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다. 영어로 하면 Holy Spirit인데, 아마 이 ‘성스러운’에 해당하는 부분이 오글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건 그냥 형용사니까 뺀다고 치면 Spirit, 즉 ‘영靈’만 남는다. 하느님은 육체이기 때문에 타고난 핸디캡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이 자신의 힘인 ‘영’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느끼고 자신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참고 – 요한 14:26/ 에베소 3:16,17)
**참고로 한국어로는 영어의 Spirit을 번역할 때 ‘영’이라는 한자를 썼는데, 국어사전에 보면 영이 무당의 ‘신령’ 혹은 죽은 사람의 넋으로서의 ‘영’을 뜻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혹시 하느님의 성령이 어떤 유령이나 귀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지 오해할 수도 있는데,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그리스어 단어를 보면,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프뉴마’이다. 그리고 그 뜻은 브레스(Breath), 곧 ‘숨’이라는 뜻이다. (커피 브레스) 그 ‘숨’이라는 뜻에서 파생이 되어 ‘바람’도 의미하게 되었고,(요한 3:8) 바람이 실제 존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로도 확대가 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 즉 영적 세계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하느님과 같은 영적 존재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힘을 뜻하기도 한다. (그 두 가지 뜻 모두가 사용된 성구 – 고린도 후서 3:17 / 링크를 따라가면, 이 성구에서 ‘영’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 프뉴마(Πνεῦμα)가 두 번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영으로 우리를 도와준다는 점을 통해서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것은 각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방이 할당되어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우리 몸 어딘가에 빈 공간이 있어 거기에 뭔가 채워지는 개념은 아니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특정한 방식으로, 영의 세계에 근원을 둔 특정한 힘이 육체(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게끔 설계된 특정한 영의 공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공간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와 유사한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의 생각은 사람에게 악마가 들리는 것을 묘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더 확증된다. (마태 12:43-45 / 누가 8:27-34/ 사도 행전 19:16) 따라서 ‘악귀 들림’이라는 말은 어떻게보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 정말 특정한 영적인 방이 있고 그 방이 하느님의 힘이 아닌 악귀들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건 말 그대로 악귀가 들려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Demonic possession 인데, Possess에 ‘사로잡다’의 뜻이 있음으로 대충 ‘악마적인 사로잡힘’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사람의 몸 속 어딘가에 빈 공간이 있어 그 공간으로 악귀들이 들어간다는 생각은 옳지 않은데, 물질계인 육체에 영계의 천사들이 문자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귀가 들어간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주어진 영적 공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 13:27)

그런데 생각해보면 악마들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이상 ‘영적인 존재가 육적인 존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시스템 자체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런 방 혹은 시스템이 존재하기에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고, 물질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악귀가 들렸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애초에 하느님이 그런 시스템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면, 악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나 권한은 분명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렇게 사람이 영의 힘을 받는 마련도 사랑에 근거해있다고 추리하는 것이 옳다. 단지 악귀들이 악용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고린도 후서 1:3/ 요한 1서 4:8)
다만 문제는 저번 글 끝 부분에서 밝혔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 아니면 사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흑백논리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사탄이 하느님을 떠나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했고, 사람에게도 그런 자유가 주어졌는데, 이 때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암시적으로 ‘나는 사탄이 창조해준 하느님을 떠난 절대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좋다.’ 는 뜻이 되고 악귀들은 우리에게 더 영향력을 행사할 합법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한 13:27/ 디모데 후서 2:26)
따라서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느님의 영을 받고있든지 아니면 사탄과 악귀들의 영을 받고 있든지 반드시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게 성서의 가르침이다. (에베소 2:1,2 / 야고보 4:4/ 고린도 전서 10:21,22)
물론 그렇다고 현재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악귀가 들려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게든 많게든 모든 사람은 그들의 영향을 받고있고(계시록 12:9), 사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더욱 더 자신들의 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을 아무 권한이나 허가를 받지 않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의 전략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영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명백하게 싫어하는 죄를 사랑하고 거기에 중독이 되어 계속 자신들의 영을 자의로 폭풍 흡입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계속 죄를 짓게 만들어 하느님에게 절대로 못 돌아가게 만들어야한다. (요한 1서 3:8) 실험용 마약에 중독된 기니피그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의 법칙에 따라 죄를 계속 지으면 자신의 성령을 공급하실수가 없다. 그 사람이 알고 죄를 짓든 모르고 하든 마찬가지다. (에베소 4:30) 따라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느님과는 멀어지고 악귀들과는 영적으로 가까워진다.
악귀들이 조장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는 인류 전반의 양심에도 불쾌한 것들이지만, 이런 것쯤이야 양심을 무디게 만들고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 해결되는 간단한 일이다. (디모데 전서 4:1,2 / 이사야 5:20) 사탄의 주장은 바꿔 말하면 하느님의 통치보다 자신의 통치가 더 우월하다는 것이고 또한 하느님의 통치는 부당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의로 하느님의 통치를 거절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만약 진짜로 사람이 하느님의 뜻 대신 사탄의 뜻을 행한다면 사탄이 우리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합법적인 권한을 그에게 주는 셈인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6-8 / 야고보 4:4)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을 닮아가기 위해 성령을 받는 것인데 그게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육체라는 껍데기밖에 없게 된다. (유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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